많은 신자들의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한 번 구원받은 사람이 고의로 죄를 지으면, 그 구원은 취소되는가?"라는 질문은 깊은 신학적 성찰을 요구한다. 특히 히브리서 10장 26-27절과 6장 4-6절의 구절들은 마치 구원받은 후 죄를 짓는다면 구원이 무효화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말씀들은 근본적으로 복음의 본질, 구원의 지속성, 그리고 신자의 영적 책임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을 필요로 한다.
이 글에서는 고의적으로 짓는 죄, 즉 고범죄(고의적 죄)의 본질과 그 의미를 맥락 속에서 탐구하고, 베드로의 세 번의 부인 사건을 통해 구원의 본질과 회복의 과정을 조명한다. 나아가 율법적 행위 중심 신앙과 은혜 중심 복음 신앙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명확히 밝히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구원은 인간의 도덕적 완성에 달려 있지 않으며, 오히려 복음을 부정하지 않는 믿음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기반함을 분명히 한다.
1. 히브리서 10장 26-27절의 핵심 의미: '짐짓 범하는 죄'는 29절의 죄를 지칭함
히브리서 10장 26절은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라고 말씀한다. 이 구절은 많은 이들에게 '구원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원래의 의도와는 다른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짐짓'이라는 표현은 원어 헬라어에서 현재 분사형으로 쓰였으며, 반복적이고 습관적인 행동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단순한 도덕적 실수나 유혹이 아니라 복음을 알면서도 고의적이고 지속적으로 이를 부정하고 거부하는 태도를 뜻한다.
당시 히브리서의 독자들은 대부분 유대 배경의 그리스도인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극심한 핍박과 사회적 압력, 유대교로 회귀하려는 유혹에 직면해 있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들에게 "복음을 알면서도 다시 율법 제사로 돌아가는 것은 복음을 짓밟는 행위이며, 더 이상 속죄의 길이 없다"고 경고하고 있다.
'짐짓 범하는 죄'를 단순한 고의적 윤리적, 도덕적 죄로 오해하면 누구도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알면서도 죄를 짓고 실수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은 복음을 알고 체험한 자가 복음을 고의적으로 버리고 배교하며 율법 체계로 회귀하는 행위, 즉 29절에서 특정하는 복음의 은혜를 부정하는 믿음의 파괴를 말하고 있다.
29절은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언약의 피를 부정하며, 성령을 욕되게 한 자"를 더 큰 형벌의 대상으로 언급한다. 이는 결국 '짐짓 범하는 죄'가 복음 자체를 저버리는 근원적인 배교의 태도로, 일반적인 윤리적, 도덕적 범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2. 베드로의 부인과 구원: 실패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의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가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강력한 예시이다. 마태복음 26장 후반부에 따르면, 베드로는 예수님의 재판 과정에서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고 거듭 부인하며, 심지어 맹세와 저주까지 퍼부었다. 당시 상황은 예수님과의 연관성만으로도 심각한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베드로는 두려움 속에서 인간적 연약함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다.
핵심은 베드로가 '복음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순간의 연약함과 공포로 인한 '관계의 부인'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여전히 예수님을 사랑했고, 자신의 배신에 대한 내적 고통으로 깊이 괴로워했다. 성경은 그가 닭 울음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가 격렬하게 통곡했다고 기록한다. 이는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는 극복할 수 없는 한계를 깨달은 진정한 회개의 눈물이었다.
예수님은 부활 후 먼저 베드로를 찾아가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으로 그의 사명을 회복시켜주셨다. 이 회복은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실수를 능가한다는 진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의 연약함이 구원의 중단 조건이 아니며, 하나님은 진정한 회개와 사랑의 고백을 통해 결국 그를 다시 일으키신다.
베드로의 사건은 윤리적 실패가 구원의 상실을 의미하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는 복음의 본질이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음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