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기독 영화와 관련된 글을 열심히 만들어 올렸으나 50개가 넘어가면서 점점 진정성은 결여되고 의무감만으로 진행하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는 주제를 바꿔 기독 신앙인의 관점에서 보고, 느끼고, 깨달은 바, 그래서 이웃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작성해야겠다. 오늘 올리는 글은 , 20여 년 전에 쓴 글이지만 지금도 내 마음에 화인처럼 남아있는 어느 할머니와 그 집 손주의 이야기다.
조손 가정
햇볕이 따사롭던 어느 가을, 우리 집에서 건너다 보이는 산 중턱에 사시는 이웃할머니 집에 들리러 갔다. 할머니께서 보내주신 고구마를 한차례 쪄먹고 나서 답례 차 들린 길이었다. 할머니 댁은 산중턱에 지어진 작고 허름한 집이지만 높직한 곳에 있어서 동네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집 중에 하나다. 이 집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4학년짜리 손주 이렇게 세 식구가 산다. 할머니께서는 70세가 넘으셨음에도 얼마나 부지런하고 깔끔하셨든지 한눈에 보기에도 집 안팎이 반들반들 윤이 나는 것 같았다. 효부 상을 수상하실 정도로 시부모와 일가친척 모두에게 극진하셨던 할머니 이야기를 듣다 보니 ‘한 가정이 화목 하는데도 저렇게 참아야 할 일이 많구나’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평생을 가정의 화목을 위해 희생해 온 그 할머니에게 참아야 할 일이 하나 더 늘었다. 서울에서 아들과 함께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던 며느리가 집을 나간 후 영영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혼자된 큰아들보다 할머니 마음을 더 아프게 한 것은 손주였다. 제 아빠가 밖에 나가버리면 혼자 남은 손주는 하루 종일 집안에 갇혀서 아빠가 사다 놓은 과자와 음료수 같은 것을 먹고 혼자 놀면서 아빠 돌아올 때만 기다렸다고 한다. 무려 3개월 간을 큰아들은 집나간 애 엄마를 찾겠다고 산지사방을 다니면서도 그 사실을 할머니에게는 알리지 않았고 아이에게조차 할머니에게 알리지 못하도록 입단속을 시켰다고 한다. 딸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할머니는 그 즉시 서울로 좇아올라가 손주를 데리고 내려오셨다고 한다.
동네 주민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아이
그 할머니 손주를 내가 만난 지는 3년 남짓 되었다. 그 아이는 우리 애가 한 학년이 아래였음에도 거의 매일 저녁 우리 집으로 놀러 왔다. 연유를 들어보니 우리 애와 친해서만이 아니었다. 자기가 맘 놓고 갈 수 있는 집이 동네에서 우리 집 하나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같은 또래 친구 집에 놀러 가면 친구가 놀아주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미처 놀기도 전에 친구엄마의 꾸중을 듣고 쫓겨나기가 일쑤였다는 아이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처음에 ‘이렇게 조그만 시골 동네에 함께 살면서 어른이 아이들한테 그렇게까지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애가 우리 애와 어울려 놀기 시작한 지 며칠이 채 되기도 전에 그 애를 집에 발도 못 붙이게 쫓아버린 어른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도 그런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아이는 내 집 남의 집 구분이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안방이건 건너방이건 드나들었다. 마당과 거실의 구별도 없었고, 문은 거의 닫고 다니는 법이 없었다. 그야 말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아이였다. 일례로 그 아이가 사는 바로 아랫집에 딸아이가 셋 있는 집이 있는데 그 집 아빠가 큰맘 먹고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 컴퓨터를 한 대 들여놓았다. 그 집으로서는 거금을 주고 들여놓은 물건이라, 쓰기 위해 산 것이 아니라 모셔놓으려고 산 것처럼 아끼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그 컴퓨터가 얼마 안가 고장이 났다. 할머니 손주가 아랫집에 컴퓨터 들여놓은 것을 알자마자 가서 만졌기 때문이었다. 이 아이는 자기가 컴퓨터를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아랫집으로 달려갔고 견디다 못한 아랫집은 집을 비울 때마다 현관문을 채워놓고 나갔다. 그렇게 단도리를 했음에도, 어느 날 밭에서 돌아와 잠갔던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아랫집 아주머니는 깜짝 놀랐다. 그 아이가 방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고 보니 미처 잠그지 않은 창문을 열고 넘어 들어와서 노는 중이었단다. 이 아이는 할머니가 차려주시는 밥은 잘 먹지 않았고 과자라든지 마른 라면을 입에 달고 다녔다. 그리고 어떻게 부산스러운지 아이가 지나다닌 곳은 뭔가가 하나씩은 깨지거나 부서지거나 해서 꼭 흔적이 남았다. 아무리 타이르고, 야단을 치고, 몇 일간 출입금지를 시키고 해도 그때뿐이었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엄마에 대한 아이의 마음
그 아이가 우리 애와 어울려 놀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할머니께서는 가끔 우리 집에 들르셨다. 내려오실 때는 빈손으로 오시지 않고 언제나 고추라든지 배추라든지 텃밭에서 가꾸신 푸성귀를 가지고 오셨다. 그러시면서 늘 “우리 손주 잘 좀 부탁해유”라고 말씀하셨다. 그 아이를 보면 속상하다가도 그 할머니 생각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그 할머니 집에 들러 안방에 걸린 가족사진을 본 후부터는 그 아이에 대해 못마땅해했던 내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요즘은 앨범에 사진을 잘 정리해서 보관하지만 할머니 할아버지 계시는 시골집에는 여전히 옛날식으로 큰 사진액자 하나에 자잘한 흑백사진들을 가지런히 붙여놓고 유리를 끼워서 벽에 걸어놓은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할머니 댁 안방에도 그런 사진틀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얀 종이테이프 같은 것이 군데군데 붙여져 있었다. 할머니는 손주가 한 짓이라고 하시면서 “글쎄 그놈이 제 엄마 얼굴 들어있는 데마다 저렇게 테이프를 붙여놓았지 뭐유”. 몇 차례나 할아버지가 야단을 친 후 떼어버렸는데도 “자기를 버리고 간 미운 엄마가 보고 싶지 않다”라고 하면서 기어이 저렇게 흉하게 붙여놓았다고 말씀하시면서 “어린것이 얼마나 엄마가 미웠으면 저렇게 했겠느냐”라고 눈물을 글썽거리신다. 그때서야 나는 그 아이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엄마가 너무나 그립고 보고 싶은데도 볼 수가 없어 견딜 수 없었던 아이의 마음을...., 그리고 그 아이가 왜 그렇게 부산스럽고 행동이 유난스럽고 시끄럽게 떠들고 다녔는지를.....
그 후 3년이 지나고 중학교 1학년에 진학한 그 아이는 여전히 학교에서 돌아오면 우리 집에 전화를 건다. 자기보다 한 살 적은 우리 아이가 초등학교에서 돌아왔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중학생이 되어서인지 그전처럼 불쑥불쑥 방문을 열고 뛰어 들어오지는 않는다. 우리 집에 놀러 올 때나 다 놀고 돌아갈 때는 곧잘 인사할 줄도 안다. 얼마 전 할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져 몇 달간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엔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가방을 멘 채 우리 집으로 오곤 했다. 집에 가봤자 자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얘기를 들어보면 아침은 안 먹고 점심은 학교급식으로 해결하고 저녁은 주로 라면을 삶아 먹는단다. 그래도 아이 방에서 같이 놀 때는 여전히 시끄럽고 부산스럽다. 며칠 전에는 식당에 나무로 짜서 달아놓은 모기장 문틀을 댕겅 분질러 놓았다. 전 같으면 그런 것 개의치도 않았을 녀석인데 이젠 내 눈치를 살핀다. 이렇게 말 짓을 할 때는 순간 속상하다가도 그 아이의 화려한 이력이 동시에 떠오르면서 쓴웃음을 짓고 만다. ‘자기가 한 짓이 남에게 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만큼 철이 들었다는 사실이 대견하기 때문이다. 우리 마당에서 고개만 들면 바라다 보이는 할머니와 손주가 살던 그 집은,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빈 집이 되어 비어 가는 농촌 마을에 풍경으로만 남아, 가까이 지냈었던 이웃들의 기억만을 일깨우고 있을 뿐이다.